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센과 페터르의 난 (문단 편집) == 배경 == 1018년, 동로마 제국은 42년간 이어진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불가리아 제1제국]]을 정복하고 다뉴브 강 이남의 발칸 반도 패권을 완전하게 확보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인들이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하도록 노력했다. 불가리아 왕족과 귀족, 종교 지도자들을 정중하게 대우했으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불가리아 속주 주민들이 세금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세금을 인하하고 곡물로 현물 납부할 수 있도록 하였고,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대주교를 황제가 서임하게 된 것 외에는 건드리지 않아서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불가리아의 남은 군대를 그대로 제국 불가리아 테마병들로 편입하였는데, 이 병력은 제국이 불가리아를 제압하는데 소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거뜬히 초과하는 수치로 추산된다. 바실리오스 2세의 이같은 조치 덕분에, 불가리아인들은 동로마 제국에 순순히 복종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 사후 후임 황제들이 외적과의 전쟁과 내정 관리를 명목삼아 불가리아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징병, 징용을 반복하면서, 제국에 대한 불가리아인들의 반감은 갈수록 증폭되었다. 그들은 [[페테르 데얀]]과 [[콘스탄틴 보딘]]을 앞세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했지만 모조리 진압되었다. 그러던 1180년대, [[이사키오스 2세]]는 발칸 반도로 쳐들어온 [[시칠리아 왕국]]과 [[1185년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침공|전쟁]]을 벌이면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불가리아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장정들을 징집했으며, 심지어 새로 황후를 맞아들인 뒤 결혼 축의금을 마련하라는 명분으로 특별세를 부과했다. 이에 타르노보 인근에 사유지를 경영하고 있던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1185년 킵셀라에 있던 이사키오스 2세에게 세금 경감과 자치권, 그리고 세금을 내는 데 필요한 수도원 수입을 받기 위해 하이모스 산 근교의 토지를 하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요청은 거부당했고, 이사키오스 2세의 삼촌인 [[요안니스 두카스(세바스토크라토르)|요안니스 두카스]]는 아센의 얼굴을 때리며 요구가 너무 무례하다고 꾸짖었다. 아센 형제는 메시아로 돌아간 뒤 반란을 꾀했지만, 동료들은 쉽사리 그들을 따라 제국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1185년 여름, 살로니카의 성 디미터르의 이콘이 터르노보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성 디미터르가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을 해방하라는 신의 뜻을 받들어 오랫동안 지고 있던 멍에를 벗었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선동했다.이에 가혹한 징세에 시달리던 민중이 호응하면서, 불가리아 제국의 부활을 꾀하는 대규모 반란이 발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